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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록

신지 않은 구두에게도 찾아온 계절

mellowbb 2025. 4. 1. 10:37

오랜만에 신발장을 열었다.
한 켤레, 또 한 켤레—
어느 계절에도 나서지 못하고 긴 시간 그 자리에 서 있던 구두들을 꺼냈다.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되는 직장.
구두를 고를 일도 없는 출근길.
몸에 밴 무게들이 하나둘 벗겨지고,
이곳이, 내 마지막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어느 날의 직감 같은 것.

 

몇 년째 신지 않던 구두 네 켤레.
그냥 버리기보다는,
누군가의 걸음을 따라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천 원 단위의 값에 당근마켓에 올렸다.

 

글을 올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한 분이 세 켤레를 찜했다.

구두를 살 때 들어 있던 얇은 종이.
쉬익—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감싸며
종이백 안에 조심스레 담았다.

 

집에 돌아와 확인해보니,
세 켤레 중 하나가 바뀌어 있었다.
그분이 고른 신발이 아니었다.

 

다음 날 퇴근길,
아파트 후문에서 다시 뵙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바뀐 구두를 돌려받고 맞는 구두를 드리는 게 순서였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몇 해 동안 신지도 않고 서 있던 것들.
이제 누군가의 발끝으로 새롭게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그분은 몇 번이고 물었고,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참 아껴서 관리했거든요.
버리긴 아깝고,
불편하지 않으시면 신어주세요."

 

서로 고맙다는 인사말로
조용한 거래가 마무리되었다.

 

요즘 따라
일도, 마음도
다 귀찮고 무거웠는데—

 

어떤 날은,
이런 작고 조용한 일이
하루를 조용히 위로해준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