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오랜만에 신발장을 열었다.
한 켤레, 또 한 켤레—
어느 계절에도 나서지 못하고 긴 시간 그 자리에 서 있던 구두들을 꺼냈다.
정장을 입지 않아도 되는 직장.
구두를 고를 일도 없는 출근길.
몸에 밴 무게들이 하나둘 벗겨지고,
이곳이, 내 마지막 자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어느 날의 직감 같은 것.
몇 년째 신지 않던 구두 네 켤레.
그냥 버리기보다는,
누군가의 걸음을 따라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천 원 단위의 값에 당근마켓에 올렸다.
글을 올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한 분이 세 켤레를 찜했다.
구두를 살 때 들어 있던 얇은 종이.
쉬익—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감싸며
종이백 안에 조심스레 담았다.
집에 돌아와 확인해보니,
세 켤레 중 하나가 바뀌어 있었다.
그분이 고른 신발이 아니었다.
다음 날 퇴근길,
아파트 후문에서 다시 뵙기로 했다.
원래대로라면
바뀐 구두를 돌려받고 맞는 구두를 드리는 게 순서였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몇 해 동안 신지도 않고 서 있던 것들.
이제 누군가의 발끝으로 새롭게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그분은 몇 번이고 물었고,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참 아껴서 관리했거든요.
버리긴 아깝고,
불편하지 않으시면 신어주세요."
서로 고맙다는 인사말로
조용한 거래가 마무리되었다.
요즘 따라
일도, 마음도
다 귀찮고 무거웠는데—
어떤 날은,
이런 작고 조용한 일이
하루를 조용히 위로해준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728x90
반응형
'일상 다반사 > 2025 일상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트 말고 방앗간 참기름·들기름 – 서산 전통시장 다녀온 날 (0) | 2025.05.24 |
---|---|
별일 없었는데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0) | 2025.05.22 |
5월 울진 여행, 왕피천 케이블카로 즐긴 바다 전망 (0) | 2025.05.18 |
조용한 식사, 소란스러운 마음 (0) | 2025.03.17 |
홍성 모섬부터 서산한우목장까지, 겨울 끝자락 서해안 당일치기 드라이브 코스 (4) | 2025.01.21 |
안동 물안개부터 묵호항 파도소리까지, 1월의 특별한 국내여행 코스 (3) | 2025.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