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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기록

아버지의 노래방, 마음의 페달을 밟다

mellowbb 2024. 12. 1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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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피아노가 아닌 발로 페달을 밟아 소리를 내는 오르간으로 음악 수업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오래된 교실, 발로 소리를 내던 하모니움(오르간)

아버지는 당시 담임선생님께
"너 음치구나"라는 말을 들으셨다고 했다.
그 한마디는 평생의 트라우마가 되어
자신 있게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단다.

 

청중 앞에서는 한두 곡만 조심스럽게 부르시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한 시간이 넘도록 노래하시던 아버지.
타고난 음색은 좋으셨지만, 박자감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다.

어릴 적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었지만,
노래하고 싶은 마음만은 한결같으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시골 농막에서 혼자 연습할 수 있도록
노래방 기계를 갖추고 싶다고.

 

자식들에게는 아낌없이 쓰시면서도
정작 본인 물건은 항상 망설이시던 아버지는
중고 거래 앱을 뒤지며 노래방 기기를 알아보고 계셨다.

 

나는 새것을 사드리겠다고 했지만,
고집스러운 성격 탓에
쉽게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아는 분이 “요즘은 엠프와 빔프로젝터만 있어도 노래방이 가능하다”며
직접 설치한 영상을 보여주셨다고 한다.

 

기계에 서툰 아버지는
모델명과 사진을 들고 오셨고,
추천받은 제품이 CR400이라는 엠프였다.

 

퇴근 후 집에 오니
거실엔 매뉴얼과 부속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셨던 모양이다.

 

'진작 내가 알아보고 사드릴 걸...'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설렘으로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이
소년처럼 보였다.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사이즈의 빔프로젝터를 원하셔서
예전에 SK텔레콤에서 출시한 미니빔까지 알아보았다.
1차 구매는 실패, 2차 구매는 나름 성공이었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만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어드릴 차례다.

 

과거 농막에 CCTV를 설치할 때도
와이파이부터 블루투스까지 직접 매뉴얼을 만들어 가이드했었다.
이번에도 분명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딛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신
아버지의 작은 용기일지도 모른다.

 

시골 농막에서
배호 가수님의 노래가
마음껏 울려 퍼지는 날을 기대하며,
오늘부터 사용설명서를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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